드디어, 한반도의 대중문화가 한 단계 도약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매스미디어가 출현하게 됩니다. 1927년 이 땅에서 출발한 K-방송의 1번 타자, 경성라디오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경성라디오의 처음과 끝을 살펴봅니다.
경성라디오의 시작
초보 예능작가 시절, 친하게 지내던 한 피디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석규 배우가 연기를 참 잘한다고 하잖아. 그 이유를 혹시 아니?" 일반적인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었을 겁니다. "글쎄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피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우 출신이라서 그런 거야." 솔직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왜요." 족집게 과외를 해준다는 느낌의 표정을 한 피디는 즉석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시나리오가 씬1, 씬2, 씬3 해서 씬 120, 씬 121 하는 식으로 되어 있잖아. 근데 이걸 촬영한다고 할 때, 씬1 찍고 씬2 찍고 하면서 순서대로 찍는 게 아니거든. 촬영 첫날 맨 처음 찍는 장면이 씬33일 수도 있어. 그다음 촬영은 씬12를 하고 바로 이어서 씬98을 찍기도 해. 왜? 이게 결국 경제적인 면이 제일 큰 건데, 같은 장소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을 한데 몰아서 찍는 거라고.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연기자는 스토리 전개에 따라 감정이 왔다 갔다 해야 되잖아. 유식한 말로 감정선 처리를 잘해야 해. 그럴 때 포인트는 목소리 톤이거든. 의상이나 표정이야 눈에 보이는 요소니까 기본이고, 중요한 건 목소리 톤인데 성우들은 소리에 관한 한 트레이닝이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성우 출신들이 연기를 잘 하는 거야."
성우. 말 그대로 목소리 연기자입니다. 이들의 주 무대는 다큐멘터리나 각종 정보 프로그램 영상에 내레이션을 하거나 CF, 외국 영화의 더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엔 오디오 북에서도 수요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우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가다 보면 결국 만나는 건, 라디오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라디오는 언제 생겼을까요. 1927년 2월 16일 서울 정동에서 처음으로 전파를 발사한, 경성라디오방송국입니다.
그 시절 경성라디오에, 라디오드라마가 있었다
이는 일본제국에 의해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 이어 네 번째로 개국한 방송국입니다. 미국에서 맨 처음 전파를 이용하여 다중에게 소리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송'이라는 것을 시작한 게 1920년이었고, 일본이 처음으로 라디오방송을 시작한 게 1925년이었으니 조선 땅에 도입된 건 꽤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인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차원과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을 보다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추진했지만.
방송 시간의 대부분은 일본어로 했고 사이사이에 우리말 방송을 했는데 뉴스와 궁중음악을 비롯한 남도잡가나 서도민요 등 국악을 들려주는 음악 프로그램이 고작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예능인은 주로 기생들이 담당했습니다. 라디오 마이크 앞에 서서 무언가를 한다는 게 천한 직업으로 여겨져 하려고 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은 그렇다 쳐도, 내용도 문제였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콘텐츠의 부족을 느꼈고 새로운 콘텐츠로서 부상하기 시작한 건 라디오드라마였습니다.
놀랍게도 경성라디오가 개국하기 전부터 라디오극에 관한 연구들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라디오극 연구회'를 비롯해서 '무선극 연구회', '경성 라디오드라마 연구회', '경성방송극 연구회' 등의 모임이 생겼고, 프로듀서와 작가들의 열정과 도전은 방송국의 개국과 때를 맞추어 이 땅에 최초의 방송극을 공중에 띄우는 성과를 거둡니다. 그때가 마침 노르웨이 작가 입센의 탄생 100주기를 맞은 때라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을 라디오드라마로 각색하여 방송합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거기에서 나오는 위기와 갈등이 클라이맥스로 향해 치닫는 극적 묘미는 청취자를 열광하게 하였습니다.
콘텐츠가 관심을 끈다는 것은 콘텐츠를 담고 있는 그릇에 대한 수요도 늘어난다는 얘기입니다. 당시 경성방송국의 청취자 수는 개국연도인 1927년에 1,440여 명에 불과했던 것이 1937년에는 10만 명을 돌파합니다. 라디오드라마가 크게 기여했습니다.
흔히 대한민국 라디오드라마의 전성기는 1960년대, 70년대를 얘기하는데 1930년대도 라디오드라마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에는 아예 '라디오 프로그램'란이 있었습니다. 그날 방송될 라디오드라마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꼭지였죠. 1933년 10월 29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오늘 밤 방송, 금붕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이은희와 박영희는 결혼 77년 차 부부이다. 박영희는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이은희는 인기 절정의 배우였다. 남편은 아내의 공연을 보면서 매우 흡족했다. 그러나 아내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부부의 갈등은 심해져 이혼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남편은 아내의 인기에 시기를 느껴 아내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일제의 항복으로 경성라디오도 작별을 고하다
1937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국을 침공하면서 일기 시작한 전쟁의 광풍은 경성방송국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탄압을 증대시켜 방송을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선전도구가 되게 합니다. 1941년 12월 일제의 진주만 기습으로 전쟁이 극에 달하면서 방송은 조선인을 징용과 징병에 동원하기 위한 독려방송으로 채워졌고,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을 끝으로 이 땅에서 방송 전파는 휴지기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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