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조선 민중의 사랑을 받은 신불출이라는 희극인이 있었지만, 장차 라디오와 TV에서 국민의 배꼽을 빠지게 할 코미디언들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서양 연극이 들어와 구파를 밀어낸 신파가 시작되고, 막과 막 사이에 막간 가수가 나타나고 막간 희극인이 출현하면서 극과 노래, 희극이 합쳐져 조선판 뮤지컬이라 할 수 있는 악극이 탄생합니다. 한반도를 돌며 민중을 울리고 웃겼던 악극에서 마침내, 코미디언이 배출되기 시작합니다.
악극단 전성시대 개막, 서서히 깨어나는 능력자들
1945년 일제강점기 시대가 끝나자 악극단은 제 세상을 만납니다.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서울에서만 무려 30여 개의 악극단이 활동합니다. 해방 전의 악극과 해방 후 악극의 가장 큰 차이는 사회적인 변화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순사들의 위협적인 눈초리와 무지막지한 검열에서 비로소 해방된 겁니다. 천재는 언제 탄생할까요. 능력자들은 언제 깨어날까요. 해방과 함께 한반도 곳곳에서는 대한민국을 웃음으로 뒤흔들려고 하는 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직후 서울. 아코디언을 메고 거리를 걷던 19세의 소년에게 한 남자가 다가옵니다. "학생, 내가 악극단에 있는데 악사가 부족해서 그러는데, 같이 할 수 있겠니?" 소년이 건네받은 명함을 보니 태평양가극단이었습니다. '두만강 푸른 물에~~'의 유명 가수 김정구의 형 김정환이 이끄는 곳이었습니다. 곤혹스러워하던 소년의 집까지 찾아와 아버지에게 간청합니다. 결국 소년은 '딱 3일만' 아르바이트하고 오라는 승낙을 받고 길을 나서 태평양가극단의 악사가 되는데, 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계기는 한 배우의 실종이었습니다. 악극을 시작해야 하는데 코미디 전담이었던 배우 김대봉은 나타나지 않았고 관객은 폭발 일보직전이었습니다. "야, 아코디언! 네가 해. 맨날 봐서 대충 알잖아!" 그렇게 해서 소년은 순식간에 악사에서 코미디언이 됩니다. "김용환 선생이 나보고 대신 올라가서 해서 얼떨결에 무대에 섰지. 앞이 깜깜하고 정신이 없었어. 그냥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대사를 막 지어가면서 하긴 했어. 근데 손님들이 웃고 난리더라고." 평범한 아코디언 연주자에서 위대한 코미디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구봉서입니다.
열아홉 소년 구봉서가 서울에서 태평양가극단의 악사가 되고 코미디언이 되던 그 해, 강원도 춘천에 살던 동갑내기 소년은 희극배우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춘천에서 공연을 한 모 악극단이 흥행에 실패했고 망하는 바람에 여관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라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소년은 기회가 왔다면서 결심합니다. 돈주머니 옆에 차고 주무시던 어머니 몰래 끈을 잘라내어 들고 후다닥 달려가 악극단장에게 바쳤고 단원이 됩니다. 온갖 심부름 다해가며 단역으로 출연하지만 악극단은 1년 후에 해체되지만 소년은 포기하지 않았고 서울로 와 변두리 극장에서 닥치는 대로 무대경험을 쌓으며 내공을 키워나갑니다. 세월이 흘러 1969년. 막 개국한 MBC-TV의 새로운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에 우편배달부 역할로 출연, "편지요!" 하며 들어가다 마당에 널린 도배지 때문에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는데, 그날 이후 대한민국은 그의 비실대는 춤과 바보 연기에 뒤집어집니다. 구봉서와 명콤비가 되는 그를 우리는 배삼룡이라 불렀습니다.
구봉서와 배삼룡 보다 두 살 어린 한 소년이 1946년 극장 황금좌에 간판을 그리는 화공으로 취직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의 흉내를 잘 내곤 해서 그런지 간판만 그리고 있기에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짬이 날 때마다 관객의 박수를 받는 무대 위 배우들을 훔쳐봤고 결국 붓을 던지고 신세기악극단에 들어갑니다. 구봉서가 배우가 오지 않아 갑자기 대타로 기용돼 배우가 된 것처럼, 소년도 단골 바보 역으로 인기를 끌던 한 희극배우가 급환으로 사망하자 대역으로 나서면서 코미디언이 됩니다. 그는 때리고 넘어지는 연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는데요, 구봉서와 배삼룡이 악극단에서 내공을 쌓으며 명성을 얻어 가던 1965년 TBC-TV 개국과 함께 대중 앞에 나서 사랑을 받는 전 국민의 '살살이'가 됩니다. 그가 바로 서영춘입니다.
우리는 이 분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대한민국 코미디의 1세대 트로이카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한 사람을 추가하고자 합니다. 구봉서, 배삼룡 보다 한 살 어리고 서영춘 보다 한 살 위였던 남자. 북한에서 태어나 해주음악전문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다 북한군의 선전대로 일하고 월남하여 군에 입대해 군예대 무대에도 서고 전쟁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악극단을 찾아다녔고 창공악극단의 단원이 됩니다. 1955년, 그의 나이 스물여덟, 그의 이름 송해입니다.
대한민국의 코미디는 이들로 인해 막이 올랐습니다. 구한말 박춘재의 재담과 일제강점기 신불출의 만담에서 시작하여 해방 후 전국을 유랑한 악극단의 무대에서 식민지에서 막 벗어난 조선 민중을 위로했고, 한국전쟁을 치러낸 한국의 국민에게 웃음을 찾아주었습니다. 故 구봉서가 말했습니다. "난 운이 좋았다. 해방되던 해 우연히 악극 악사로 무대 인생 시작했고, 도망간 배우 대신 잠깐 선 악극 무대가 날 스타로 만들었고, 악극이 기우니까 영화판이 날 불렀고, 영화배우가 시들해지자 텔레비전 붐이 일어 오늘까지 현역으로 뛰니 기막히게 운 좋은 사내다." 배삼룡은 왜 바보가 되었을까요. "남이 안 하는 연기, 남이 싫어하는 연기를 꼭 해보겠다는 욕심이었다. 대부분 비극이었던 당시는 바보스러운 연기로 대중을 웃기는 연기자가 없었다. 난 그걸 하고 싶었다." 셋 중 가장 먼저 세상을 하직한 이는 서영춘이었습니다. 동상이 세워졌고 제막식에서 송해는 서영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영춘이! 그대가 외쳤던 말,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사회를 향한 통렬한 질타였고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예언이 되는 교훈이었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없던 시절에 아무 것이나 잘 먹자는 소리였으니. 뿐인가? '살살이…', '요건 몰랐을 거다', '배워서 남 주나' 이 말은 면학을 장려한 말이었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고뿌 없이는 못 마십니다.' 이 말 또한 가진 것을 잘 활용하라는 일침 아니었나?"
악극단이 배출한 코미디언 배삼룡, 구봉서, 서영춘 그리고 송해 또한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이들의 코미디는 후배들에 의해 아직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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