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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송은 어떻게 흘러왔나

신불출을 아시나요?

by 빵주작가 2023. 4. 30.

1930년대에서 4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식민지 조선 민중에게 인기 있었던 희극인이 있었습니다. 신불출. 어떤 사람이고, 어떤 활동을 했으며, 지금은 기억하는 이들이 왜 별로 없는지 말씀드립니다.

 

일제강점기 만담의 스타 신불출

1990년대 초보 예능 작가 시절에는 일본의 방송 프로그램을 많이 봤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갔던 그들의 방송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만드는 프로그램들은 예능, 교양 가리지 않고 대부분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미디언들이 콤비로 짝을 지어 활동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다운타운, 런던부츠, 톤네루즈 폭소문제 등이 있었습니다. 두 명이 개그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웃음을 자아내는, 이른바 만담의 형태였습니다. 어릴 때 생각이 났습니다. 1970년대 초등학생 시절 본 TV 속에서는 백남봉이 혼자서 우스갯소리를 했고, 남보원이 입으로 뱃고동 소리를 부웅~’ 소리를 냈고, 장소팔 고춘자가 콤비로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습니다. 남철 남성남이 무대 오른쪽에서 왼쪽을 왔다 갔다 했고, 서영춘이 무대 위에서 시골영감 첨 타는 기차놀이라~” 랩 같은 노래를 불렀고 배삼룡이 무대 위에서 엎어지고 자빠졌습니다.

 

이왕 거꾸로 돌린 시곗바늘, 더 돌려보겠습니다. 웃을 일이 별로 없었을 일제강점기 시절, 1930년대 어느 날 경성의 한 극장 무대 위에는 만담 하나로 식민지 조선 민중을 웃기고 울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신불출입니다. 연극의 막과 막 사이에 무대 위로 올라가 관객을 들었다 놨다 했습니다. 신불출이라는 사람은 당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했을까요. 19351월 3일자 <매일신보>에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중성(衆星)이 싸고도는 각계의 일인자’. 당시의 스타급 인물들을 소개하는 내용인데 무용에 최승희, 판소리에 이화중선, 여배우 김연실, 바둑의 정규춘, 변사에 김조성, 야구의 이영민, 권투 서정권 그리고 만담의 스타로 신불출이 당당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불출에 관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종로거리 어떤 축음기상회에서 흘러나오는 ’익살맞은 대머리타령에 흥이 겨워 어떤 60 가량 된 노인이 발을 멈추고, 그 노래를 정신없이 듣다가 대사 중에 히히거리고 웃는 데가 있자 그 노인도 소리를 높이고 따라 웃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십여 명이 모여들고 옆에서 같이 듣고 서 있던 사람들조차 박장대소한 사건이 수일 전에 있었다. 그 대머리 타령을 취입한 사람은 만담계에 이름이 높은 신불출 군이니 그만하면 신 군의 만담이 어느 정도까지 인기가 있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금년 28세 되는 청년이니 앞날을 기대함도 많거니와 현재 만담으로는 경향을 통하여 엄지손가락을 꼽고 있는 처지다. 우울과 오뇌로 즐거움을 모르고 사는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한때나마 입을 열어 웃게 하니 그 공도 적다고 할 수 없다.

 

사회파 개그맨 신불출

1920년대에 주로 신파극을 하던 극단 취성좌가 개성에서 공연했을 때, 송도고보 학생 신영일은 연극에 전율을 느껴 자신의 인생을 걸겠다고 결심, 극단에 입단합니다. 신불출은 요즘으로 치면 개념 연예인이었습니다. 공연 중 대본과 다르게 애드리브를 해서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고초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신불출을 전국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만담음반을 취입했기 때문인데, ‘익살맞은 대머리음반은 당시 오케레코드사를 굴지의 음반회사 반열에 오르게 했습니다. 당시 음반을 2천 장 판매하면 손익분기점을 맞췄는데, 이 음반은 발매 보름 만에 2만 장을 판매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좌우갈등이 극심했던 시기에도 신불출의 만담을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곱게 두지 않았는데요, 1946611일 명동의 국제극장에서 열린 6·10 만세운동 기념공연 현장에서 신불출이 만담을 하던 중 청중석에서는 야유가 나오고 급기야는 청년들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신불출을 끌어내리고 구타를 합니다. 남쪽이 아닌 북쪽의 편을 드는 만담을 했기 때문입니다. 송해 님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38선을 허리띠에 비유한 만담을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식입니다. "여러분, 지금 허리띠들 매고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화장실 가면 허리띠를 풀어요, 안 풀어요? 우리 인생도, 나라도, 허리띠를 풀어야 합니다" 당시 급변하는 세계를 향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세계일주를 하게 된다면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만나서 조선 한약 환장탕을 잡수어 보시는 것이 어떠냐고 권하고 올 테야" 

 

그에게는 만담에 관한 확고한 철학이 있었습니다. "만담은 웅변도 강연도 아니외다, 말장난은 더더욱 아니올시다, 만담에는 사람의 가슴을 찌를 만한 그 어떤 진실이 필요하외다".

 

신불출의 이름이 잊힌 까닭

이렇게 기개 넘쳤던 신불출이었지만, 창씨개명도 될 대로 돼라’는’ 뜻의 에하라 노하라로 한 그였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끝까지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좌우대립 속에 그는 결국 1947년 월북하고 한국전쟁 때 문화선전대 활동으로 1957년 공로배우가 된 후 1961년에는 문예총 직속의 신불출만담연구소 소장이 됩니다. 하지만 통제사회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1962년 모든 공직을 빼앗기고 협동농장으로 추방된 뒤 숨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단락을 마무리하기 전에 꼭 언급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박춘재. 신불출의 만담 이전에 박춘재의 재담이 있었습니다. '재담'은 전통사회에서 판소리 광대나 유랑 연예집단인 남사당패 등에서 애용된 장르였습니다. 박춘재 재담이 독보적이었던 건 전통적인 소리에 녹여냈기 때문입니다. 괜히 조선 제일류 가객 박춘재가 아니었습니다. 신불출의 만담도 그의 공연을 보고 진화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박춘재의 재담에서 시작하여 신불출의 만담으로 완성되고 나중에는 원맨쇼로 발전하는데요, 가수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을 거쳐 윤부길, 후라이보이 곽규석, 남보원, 백남봉, 쓰리보이 등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그러한 맥이 과연 있기나 한 건지 잡을 수 조차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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