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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송은 어떻게 흘러왔나

라디오드라마에 울고 웃다

by 빵주작가 2023. 5. 3.

<웰컴 투 미스터 맥도널드>라는 일본 영화가 있습니다. 방송사 내부에 있는 라디오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넓지 않은 공간에서 2시간 가까운 스토리가 진행되는 놀라운 영화입니다. 성우들이 라디오드라마를 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온갖 우여곡절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요즘은 방송하는 채널을 찾아보기 힘든 라디오드라마라는 장르의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는데요, K-방송의 시작점에도 라디오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시작한 라디오드라마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정지됐던 경성방송국이 다시 시작한 건 그해 99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의 극심한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된 모습으로 진용을 갖추는 건 194610월에 가서나 가능했습니다. 라디오드라마는 해방 후에도 식지 않고 재개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방송된 건 비록 소설낭독 형식으로 유호 작가의 <기다리는 마음>이었지만, 홍은표 작가의 <화랑 관창>이 최초의 방송극으로 기록됩니다. 라디오작가 윤혁민의 회고에 의하면,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46, 일주일에 두 번 어린이 시간에 라디오드라마를 했는데 그걸 듣기 위해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도 시간만 되면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고 합니다. 그 드라마는 <똘똘이의 모험>이었습니다. 미 군정청의 여성 고문관이었던 브라운이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에서 소재를 가져오고 미국인 작가 랜돌프가 집필한 것을 극작가 김영수가 각색하고 연출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3년간 방영되면서 비록 어린이극이었지만 수년 후의 연속 드라마 시대를 예고한 것이기도 합니다.

 

서서히 라디오드라마라는 틀이 제대로 갖춰지기 시작합니다. 무대 대본을 해설자의 상황설명을 곁들여 낭독해주던 형태로부터, 음악과 효과음이 들어가고 등장인물들의 역할에 따라 각기 다른 사람들이 대사를 주고받는 완전한 입체형식의 방송극에, 사람들이 새로운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KBS19483월 방송극 극본을 공개 모집했는데, 무려 90편의 작품이 응모했습니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관심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요, 19506월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 모든 관심과 열기를 일거에 삼켜버리고 맙니다만 라디오 분야에서의 발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트랜지스터라디오의 보급이었습니다. 전깃줄도 필요 없이 주먹만 한 크기의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나오는 전파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밭고랑에서 허리 굽혀 일하던 농부들이 그 작은 물건에서 나오는 민요나 유행가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는가 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연속극을 들으며 울고 웃었습니다.

 

라디오 드라마 <청실홍실>에 울고 웃은 국민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라디오방송의 본격적인 시대가 열리는데, 기존의 중앙방송국 외에 또 다른 방송국이 개국했는데요, 19541215일 최초의 민간 방송으로 선보인 기독교방송국(CBS)입니다. 여기에 걸핏하면 정전으로 암흑세계가 되기 일쑤였던 전기 사정이 호전되면서 철야 송전이 가능해지고 국민의 생활이 점점 안정되어 가면서, 라디오 방송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됩니다. 특히 라디오드라마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생기는데, 전후 한국 재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추진된 각계 유망 인재들의 미국 시찰이었습니다.

 

19563월 미국 시찰 길에 올라 6개월간의 탐사를 마치고 9월 귀국한 한 라디오 작가는 그해 122일 일요일 밤 915분에서 45분까지 매주 방영되는 연속 드라마를 쓰기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주간 연속극으로 기록된 드라마 <청실홍실>. 조남사 작가의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전파를 타자마자 국민을 라디오 앞에 오게 했습니다. 분단과 전쟁이라는 거대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청량제 역할을 했는데, 이 드라마를 계기로 1960년대, 70년대 라디오드라마의 황금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후 박진의 <꽃피는 시절>, 조남사의 <산 넘어 바다 건너>, 한운사의 <이 생명 다하도록>, 김희창의 <깊은 산 속에는> 등 재미와 충격이 넘쳐나는 라디오드라마가 하루에도 몇 편씩 방송되었고, 덩달아 라디오 보급률도 급속도로 치솟아 오르면서 라디오드라마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덩달아 성우들도 스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라디오드라마가 생방송

라디오드라마의 전성기,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매 순간은 치열한 노동이었고 숨 막히는 전쟁이었습니다. 아직 마그네틱테이프가 도입되지 않아 모든 방송은 생방송이었습니다. 지금의 방송환경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라이브가 좋아서 한 게 아닌, 라이브로 할 수밖에 없는 기술이었던 것입니다. 한 편의 라디오드라마를 방송하기 위해서는 광고를 전하는 성우가 대기해야 했고, 이어서 드라마 주제가를 부르는 가수가 대기했고, 드라마를 전하는 성우들이 대기해야 했습니다. 대사를 틀린다? "죄송합니다. 다시 갈게요!" 라는 말은 있어서도 안 되는, 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방송사고였던 다이내믹할 수밖에 없는 좌충우돌 라디오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라디오드라마가 국민을 울리고 웃긴 1950년대를 거쳐 라디오드라마의 전성기인 1960년대~1970년대는 동시에 서서히 정상에서 내려와야 하는 준비기이도 했습니다. 196112월 한국방송텔레비전(KBS-TV)이 개국하, 1964년에는 동양방송텔레비전(TBC-TV)이, 1969년에는 문화방송(MBC-TV)이 개국합니다. 다만 텔레비전 수상기가 1964년에 3만 대, 1966년에 4만 3천 대에 불과해서 텔레비전이 아직은 라디오의 적수가 되지 못했기에, 결정적인 역전은 1980년 컬러 TV 시대가 오기까지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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