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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송은 어떻게 흘러왔나

2000년대는 예능도 아니다 교양도 아니다 재미다

by 빵주작가 2023. 6. 7.

해가 바뀐 것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무려 천년해가 바뀐 2000년대가 되면서 대한민국도 변하고 있었습니다. 시청자들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교양을 엄숙하게 전달하는 프로그램은 외면했고 웃기자고만 하는 콘텐츠에도 손사래 쳤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여 방송 제작진들도 제3의 길을 적극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쇼양'이 시작됐습니다.

 

2001년 MBC <찾아라! 맛있는 TV>의 시작

정부의 정책으로 지상파의 독과점을 막기 위해 외주제작 비율을 법으로 정하고 점점 늘려갔습니다. 방송사 밖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외주제작 프로덕션들이 생겨났고, 그들이 제작하는 프로그램도 늘어갔습니다. 저도 바깥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MBC <이야기 쇼 만남>. 나중에 SM의 설립자가 되는, 전직 가수이자 MC인 이수만이 진행하는 청소년 대상 토크쇼였습니다. 화면을 3개로 분할해 가며 기존에 보지 못한 비주얼을 구현했고 소재를 재미있게 풀어갔습니다. 스태프 스크롤을 유심히 봤습니다. 제작 캔디프로덕션. 이거다 싶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제작사 대표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메일을 보냈습니다. ‘대표님, 저는 MBC 예능국에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한 작가입니다. 귀사에서 만든 프로그램을 잘 봤습니다. 기획안을 첨부하오니, 검토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는 내용이었다. 지체 없이 답장이 왔습니다. 놀러오라고. 저는 놀러갔습니다놀러 갔습니다. 그분은 제가 보낸 기획안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자신이 만들고 싶다는 프로그램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음식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정해진 테마에 따라 식당들을 소개하는, 이른바 맛집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김 작가, 내년이면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리고, 외식하는 사람들이 무지 많아질 거예요. 식당 프랜차이즈들도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이런 환경이라면 난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외식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1시간짜리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같이 만들어보면 어때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내 머리에서 돌아간 건 음식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어떤 게 있었는가에 대한 검색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아침 시간대에 했던 <맛 따라 길 따라>가 있었고, <오늘의 요리>가 생각났습니다. 2001년 당시에 식당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딱 하나 SBS에 있긴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이라는 제목이었고, 한 주에 한 번 식당을 소개했습니다. 10여 분짜리였고, 느낌은 음식이나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사장님의 철학을 소개하는 소박한 휴먼 다큐멘터리였습니다그런데 캔디프로덕션 대표는 무려 1시간 동안 식당들만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저는 음식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웠지만,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같이 작업을 안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음식 프로그램, 정확하게 말하면 맛집 정보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1년 가을에 파일럿을 하고 바로 정규편성 되어 20011110일 첫 방송을 하고 201642일까지 무려 715회를 한 MBC <찾아라! 맛있는 TV>입니다. 저는 268회까지 했습니다. 

 

음식과 맛집이라는 정보를 예능으로 포장하다

음식을 딱딱하고 엄숙하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최대한 재미있게 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음식 다큐멘터리라는 교양과 음식 게임이라는 예능 사이에서 제 3의 길을 찾아낸, 최초의 맛집 정보 프로그램이었습니다파일럿 녹화했던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서강대학교 안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였습니다. MC인 이재용 아나운서와 정선희, 고정 패널 정원관, 김지혜, 김한석은 음식이 보여지는 모니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침까지 흘려가며 봤습니다. 다른 종류의 비빔밥 10개가 나왔고 일본의 라멘 10가지 종류가 선보였습니. 스튜디오에 비빔밥 요리사가 나와 즉석에서 조리했고 다 같이 맛을 봤습니다. 표정들이 살아있었습니다. 즐거운 척, 재미있는 척 한 게 아니라 진정으로 즐거워했습니다. 정보가 재미로 포장되어 전달이 되었습니다. 2000년대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이 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야외로 나가서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피디는 연출을 하고 카메라맨은 촬영을 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역할분담이 확실했습니다. 적어도 20세기까지는 그랬습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변화가 오기 시작했는데 방송 기술발전도 한몫했습니다. 그전에는 ENG카메라를 카메라맨이 어깨에 메고 촬영했는데 상당히 무거웠습니다. 어느 정도 촬영을 하면 내려놓고 휴식하지 않으면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카메라 크기가 작아졌습니다. 6mm카메라의 등장입니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는 피디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카메라워킹이 좋게 말해 현란해졌고 거칠게 말해 기존 영상문법이 파괴됐습니다. 성우들도 내레이션을 점잖게 읽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마구 질러댔습니다. 시청자는 새로운 스타일의 정보 프로그램에 환호했습니다. 200055일 첫 방송을 시작해서 2018년 9월 7일 종료된 프로그램 <VJ 특공대>입니. 교양 정보프로그램이 재미있어졌습니다.

 

200111, <찾아라! 맛있는 TV>1회 방송한 날 저녁, MBC에서는 교양이라는 내용을 예능이라는 형식으로 담아낸 또 하나의 프로그램이 출범했습니다. 웃기는 거라면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던 개그맨 유재석과 김용만이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책 좀 읽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채근했습니다. 뼛속까지 개그맨 신동엽이 고등학교를 찾아 아침밥을 먹고 오지 못하는 학생들의 현실에 비통해하고 0교시를 폐지하자고 외쳤습니다. 교양이라고는 1도 없을 것 같은 개그맨 이경규가 양재천으로 나가 너구리를 찾아야 한다며 매의 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감히 역사적인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는 <느낌표>입니.

 

쇼양 프로그램이 만개하다

2000년대는 쇼양이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예능과 교양을 아우르는 프로그램들이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SBS에서는 <TV 동물농장>, <결정! 맛 대 맛>, <해결! 돈이 보인다>, <생활의 달인>이, MBC에서는 <느낌표>1, 2, 3기로 시청자들이 오랜 시간 느낄 수 있게 했고 <신비한 TV 서프라이즈>200247일 시작하여 서프라이즈 하게도2023년 6월 7일 지금도 건재합니다. KBS에서도 인포테인먼트는 강세를 보였습니다. 2003629일 건강을 테마로 하는 쇼양 프로그램 <비타민>이 태어났고, 같은 해 118일은 <스펀지>가 첫 선을 보였습니다. 200579일은 이런 소재로도 재미있게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구나 느끼게 한 안전 쇼양’ <위기탈출 넘버원>이 안전한 항해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재미를 무기로 하는 교양과 예능 사이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렸습니다.

 

쇼양 프로그램은 이제는 어엿한 하나의 장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교양만도 원하지 않고 그저 웃기기만을 바라지도 않은 시청자들의 선택을 제작진들이 받아들인 덕분입니다. ‘재미라는 요소가 가장 고려해야 할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쇼양의 깊이와 넓이는 마치 무한 팽창하는 우주처럼 진화하여 왔고 방송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그렇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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