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가을, 앞으로 20여 년 대한민국의 코미디를 책임지게 되는 프로그램의 파일럿이 KBS-2TV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메인타이틀은 <토요일 밤의 열기>였습니다. '개그콘서트'라는 단어는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 부제로 하였습니다. 20세기말에 등장하여, 21세기 코미디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개그콘서트>의 시작을 들여다봅니다.
김미화가 대학로에 간 까닭은
1990년대 예능은 버라이어티와 토크쇼가 대세였습니다. 정통 코미디는 침체했다는 얘기입니다. 이른바 예능인과 셀럽들이 출연하여 개인기를 뽐내고 입담을 겨루고 야외로 나가 게임을 했습니다. 분량은 짧았지만 눈길 끄는 드라마를 경쟁적으로 보여주었으니 시청자도 제작진도 코미디에 눈 돌릴 틈이 없었습니다. 능력 있고 감 좋은 피디 작가들도 코미디 경기장을 떠나 토크쇼나 버라이어티가 열리는 그라운드로 이적했습니다. 하지만 90년대를 서서히 정리해야 하는 1999년이 되자, 이대로는 안 된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코미디언들이 나타났는데, 그중 한 사람이 김미화였습니다. 1999년에도 KBS, MBC, SBS는 늘 그래왔듯이 전속 개그맨들을 20여 명씩 뽑았습니다. 후배들에게 격려를 하고 힘이 되는 말이라도 건네려 친정 KBS를 가면, 김미화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시도 때도 없이 선배들 커피 심부름을 하거나, ‘행인1’이라는 배역이라도 들어오면 감지덕지해하는 그림들이었습니다. 매년 수십 명의 신입사원들이 꿈과 희망에 차 들어오는데 일할 공간은 먼저 들어온 선배들이 빈틈의 여지도 없이 차지하고 있고 새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후배들이 바로 뒤에서 눈 부라리고 있는 암울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회사로 갈 수도 없고 보내주지도 않는 묶여 있는 신세들이었습니다. 김미화는 결심합니다. 새로운 코미디 프로그램을 기획해야겠다고. 당시 대학로에서는 소수의 개그맨들이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콘서트였을까요? 댄스를 하는 공연이었을까요? 연극이라도 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했던 건 바로, 개그 공연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일터였던 방송사들이 코미디를 대폭 축소했고, 버라이어티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그들만의 처절한 자구책이었습니다. MBC 출신으로 정찬우 김태균 정성한이 컬투삼총사를 결성하여 ‘개그콘서트’라는 타이틀로 관객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근처의 또 다른 극장에서는 KBS 출신 백재현 등이 마찬가지의 개그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코미디의 원칙
그들이 하는 공연을 직관한 김미화는 새롭게 기획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 번째, 공개 코미디입니다. 다만, 80년대를 지배했던 공개 코미디 <쇼 비디오자키>의 느림을 그대로 재현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 나갈 공개 코미디는 스피드가 살아 있는 프로그램이어야 했습니다. 두 번째, 새로운 얼굴을 대거 내세우기로 했습니다. 백재현의 공연을 토대로 전유성과 김미화가 버팀목이 되고 새 얼굴들을 대거 기용하기로 했습니다. 6년차 중고 신인 심현섭,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진짜 신인 김영철 김대희 김준호 김지혜 등으로 팀을 꾸렸습니다. 박경림도 있었습니다. 타이틀은 컬투삼총사가 하고 있던 '개그콘서트'가 마음에 들었는데 대놓고 쓰기는 뭐해서 부제로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파일럿의 타이틀은 <개그콘서트, 토요일 밤의 열기>가 되었습니다. 나중엔 컬투에게 말했더니 흔쾌히 쓰라고 해서 오늘의 <개그콘서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1999년 가을 파일럿 <개그콘서트, 토요일 밤의 열기> 탄생
김미화 개그맨과 논의하며 새 프로그램 제작의 총대를 맨 피디는 박중민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코미디 프로그램은 절대 코미디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90년대 버라이어티 열풍이 코미디에 대한 저급한 인식을 주었기에, 새 프로그램은 무조건 고급스럽게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방송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공연물로 인식되기를 바랬습니다. 방송을 제작할 때는 세트도 세우고 NG도 나면 다시 하곤 하지만, 공연을 제작한다고 생각 한다면 끊어가는 건 용납이 안 됩니다. 관객이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공연은 계속 진행되어야 합니다. 또한 공연이기에 콩트만 나열해서는 과거와 다를 바 없으니 음악적 요소가 무조건 들어가야 했습니다. 밴드는 기본으로 깔리고 파일럿에는 변검, 그림자 공연에 러시아 마임 선수들도 불렀습니다. 여기에 스피드가 합체됐습니다. 80년대 콩트처럼 한 꼭지가 10분을 쉽게 넘어가면 안 됐습니다. 5분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무려 20개 가까이 소화했습니다. 그러자니 세트는 더더욱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많은 부분을 조명으로 커버 했고 ‘여기는 지금 아프리카요, 이번엔 가정집이에요’ 하는 식으로 우겨가며 했습니다. 의상도 매 코너마다 갈아입는 건 포기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에게 도움을 청해 마치 우주복인 듯 우주복 아닌 것 같은 우주복스러운 의상으로 했습니다. 신인들을 대거 기용한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코미디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의 결과입니다. 또한 최소 두 달은 매일 모여 연습을 해야 했기에 이른바 뜬 선배들은 대박이 난다는 보장도 되어 있지 못한 새 프로그램에 선뜻 몸을 담글 수도 없었습니다.
개그코서트는 많이 바꾸었습니다
공개코미디였기에, 홍보조차 거의 되지 않은 파일럿에 청중들을 오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소라의 프로포즈> 티켓팅에 탈락한 사람들에게 이런 티켓도 있다고 알렸습니다. 여의도에서 유동인구가 많은 공간으로 가 젊은 사람들에게 방송 녹화 사실을 알리며 티켓을 증정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99년 7월 <개그콘서트, 토요일 밤의 열기>라는 이름으로 파일럿 녹화를 했고 편집을 거쳐 그해 7월 18일 첫 방송을 했습니다. 시청률은 9%대. 당시의 TV 예능 환경에서 높은 수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시청자 반응이 무척 좋았습니다. 특히 PC통신에서 뜨거웠습니다.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공연에 가야 볼 수 있는 걸 TV에서 보다니!',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는 등 화제였습니다.
개그콘서트, 21세기를 향해 출발하다
<개그콘서트>는 결국 정규 편성되어 그해 9월 4일 역사적인 정규 첫 방송을 합니다. 당시 중앙일보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TV로 뛰쳐나온 소극장 폭소무대 - KBS에 ‘극단’이 하나 탄생했다. 이름하여 ‘개그콘서트 극단’. 코미디언 9명이 다양한 장르의 코미디를 묶어 한 편의 공연처럼 전달하는 실험적인 프로그램. 1~2분 정도의 짧은 콩트 1010여 개를 숨 쉴 틈 없이 연결해 보여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나 ‘한석봉과 어머니’ ‘백설공주’ 등의 이야기를 패러디하거나 내시 이야기, 발레 등을 코믹하게 묘사했다. 심현섭과 김영철의 성대모사도 절묘하다. 공연 ‘난타’와 유사한 타악 연주 코너나 ‘전유성의 개그 클리닉’ ‘요요 공연’ 등이 공연의 화려함을 전달한다. (중략) 가능성은 있다. 연기자와 스태프 모두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오후 7시부터7 새벽 1시까지1 회의와 연습을 한다는 점 하나만 보더라도 ‘정통 코미디의 부활’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1999년 가을 시작한 코미디 프로그램 <개콘>은 2020년 6월 26일 종영합니다. <개콘>이 시작되던 당시 방송사에서 내몰린 개그맨들이 대학로로 가서 공연을 했다면, 2020년대 코미디 프로그램의 잇따른 폐지로 지상파 방송사에서 내몰린 개그맨들은 유튜브라는 장으로 가서 스케치 코미디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답은,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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