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방송은 어떻게 흘러왔나

민주화의 바람 타고 펼쳐진 <우정의 무대>

by 빵주작가 2023. 5. 15.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썸씽 뉴. 한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화두인데요, 늘 새로운 생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다른 시선에서 나오는 기획을 고민해야 시청자의 반응을 끌어올 수 있습니다. 1987년 불어온 민주화의 바람의 시절, 방송에도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 시절 태어난 MBC의 <우정의 무대>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얘기해 봅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군대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

"충성! 뒤에 계신 분은 저의 어머님이 확실합니다!" "정말입니까?" "어떻게 아들이 엄마의 목소리를 모르겠습니까? 확실합니다!" "고향이 어디입니까?" "예, 서울입니다!" "으이구, 어머님은 강원도에서 오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들어가세요!" 작지만 딴딴했던 MC 이상용은 무대 위로 올라와 나란히 서 있는 장병들에게 뒤에 계신 분이 왜 자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동작으로 경례하는 또 한 명의 병사가 대답했습니다. "뒤에 계신 분이 어머님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뒤에 계신 분은 제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나온 겁니까?" "저희 어머니는 입대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이 방송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한 말씀드리고 싶어서 올라왔습니다!" 순간, 웃으며 보던 객석의 병사들이 숙연해집니다. "어머니, 먼저 가 계신 아버지 하고 잘 지내고 계시지요? 저는 형님들이 잘 보살펴주셔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행복하십시오, 어머니. 충성!" 앉아 있던 병사들이 다들 기립하여 눈물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랬습니다. 뒤에 계신 분이 누구의 어머니인지는 언제나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머니를 목놓아 부르고 싶어 했던 빡빡 머리 깎고 나라를 지키고 있던 청년들 때문에, 일요일 오후 한 시간 동안 많은 시청자가 웃고 울었습니다. 그들은 개그맨이 아니었습니다. 배우나 인기 가수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의 끝자락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유형의 출연자들이 등장하여 국민을 울리고 웃겼습니다. 군인이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섰던 최초의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는 1989년 4월 22일 MBC-TV에서 탄생했습니다. 

 

첫 방송부터 화제를 모은 <우정의 무대>

<우정의 무대> 이전에도 군인들이 나오는 방송 프로그램은 있었습니다. 70년대 드라마 <전우>가 대표적이었고, 성우의 내레이션이 독특했던 <배달의 기수>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정의 무대>는 그야말로 썸씽 뉴 정신을 제대로 구현했습니다. 아마도, 시대 자체가 썸씽 뉴였기에 그랬던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마침내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전두환의 친구인 군인 출신 노태우가 당선되었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이루어진 결과였기에 사회 전반에 불어온 민주주의 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듬 해 4월에 시행된 총선으로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졌고, 그해 11월 2일 이른바 '5공 청문회'가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졌기에, 방송인들도 지금까지 보다는 훨씬 더 열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게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고, 새로운 생각을 의식적으로 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다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군대라는 공간으로 시선을 돌린 것입니다. 

 

첫 방송의 녹화는 노태우 대통령이 근무했던 9사단에서 했고, 병사의 애인과 하는 코너, 병사들이 하는 장기자랑과 이경규 등의 MBC 개그맨도 나와 군대 콩트를 했습니다.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녹화를 했고 첫 방송을 했습니다. 결과는, 성공이었습니다. 장병들의 모습을 시청자는 신선함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국민 코너 '그리운 어머니'

<우정의 무대>의 대표 코너 '그리운 어머니'는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닙니다. 병사들이 장기자랑을 하고, 애인과 게임을 했지만 대박은 아니었기에, 끊임없이 아이디어 회의를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군대 있을 때 누가 찾아오면 제일 기쁠까?' 질문이 제대로 들어오니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습니다. 바로, 엄마였습니다. 핵심은 나왔고 남은 건 구성이었는데, 예능 프로그램을 지향했기에 아무도 모르게 어머니를 모셔와서 무대 뒤에 숨겨 놓은 다음 병사들이 나오게 하는 몰래카메라 방식이 고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만나게 하는 코너에 운이 더해졌습니다. 제작진이 논산훈련소를 갔을  때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한 조교가 노래를 불렀고, 훈련병들은 울음바다가 되었았습니다. 가사와 곡조가 구슬펐습니다. 여기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해병대 모 사단에서 내려오는 구전가요가 합쳐졌습니다. 당시 인기 그룹이었던 작은별가족에게 피디가 악보 채보를 부탁했고 연주를 통해 완성된 노래가 바로 '그리운 어머니'입니다. 그 결과 '그리운 어머니' 코너는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고, 국민 코너가 되었습니다. 일요일 낮이면 많은 시청자가 MBC로 채널을 고정했고, '엄마가 보고플 때~'라는 노래가 나오면 같이 따라 불렀습니다. 

 

<우정의 무대>는 외국의 방송사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그들의 두뇌 구조로는 어떻게 군대에서 군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이 가능한지 이해하기 힘들어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처럼 남자라면 누구나 의무로 가야 하는 징병제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가, 일본의 한 방송사에서는 외국의 신기한 방송 프로그램들만 모아서 보여주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우정의 무대>가 소개된 적도 있었습니다. 장병들이 무대 위에서 장기자랑을 하고, 어머니가 등장했을 때 울음바다가 되는 장면에 놀라워하던 일본의 방송 패널들의 표정이 저에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군대라는 아이템은 <우정의 무대>를 시작으로, 1998년 KBS의 <TV 내무반 신고합니다>와 2003년 <청춘! 신고합니다>를 거쳐 2016년 MBC <진짜 사나이>에서 다시 한 번한번 대박이 터집니다. 그리고 2021년 채널A의 <강철부대>도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또 한 번의 썸씽 뉴가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