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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송은 어떻게 흘러왔나

1980년대는 콩트 천하

by 빵주작가 2023. 5. 13.

1980년대의 방송이 1970년대와 비교해서 가장 다른 점은 지상파 TV의 수였습니다. 1980대는 3개에서 2개가 되어 MBC, KBS의 양대산맥 구조였습니다. 그렇기에 양 방송사의 경쟁은 무척 치열했습니다. 예능계로 좁혀서 보자면, 1980년대는 MBC는 KBS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가장 치열한 전쟁터인 주말 저녁 예능은 KBS가 MBC를 압도했습니다. 어떻게 압도했는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프로그램들로 그렇게 했는지 알아봅니다. 

 

개그맨 공채의 시작

1980년대 예능국의 가장 큰 변화로 언급할 수 있는 건, 최초로 방송사에서 개그맨을 공개채용으로 선발하여 전속의 구조로 했다는 것입니다. TBC가 1979년 최초로 개그맨을 공채로 뽑았습니다. TBC 제1기 개그맨으로 서세원, 엄용수가 들어왔고 1980년에 실시한 제2기 공채에서는 장두석, 김형곤, 이하원, 조정현, 이성미, 김은우, 주병진 등이 선발됐습니다. TBC 개그맨은 제3기가 없습니다. 방송사가 아예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접했던 충남 아산에 살던 한 대학생은 땅을 치며 분해했다고 합니다. 1982년 KBS에서도 개그맨 공채가 시작됩니다. 제1기 개그맨으로 임하룡, 김정식, 이경래, 이선민, 심형래가 들어왔고, 1983년과 84년에 걸쳐 김한국, 이봉원, 김미화, 이경애, 조금산, 김혜정 등이 들어오면서 1980년대 콩트 시대를 열어갈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 MBC에서도 개그맨 공채를 시행합니다. TBC 방송사가 사라졌을 때 비분강개했던 충남 출신의 서울예전 학생 최양락은 1981년 MBC라디오에서 개최한 개그맨 콘테스트에 지원, 당당히 대상으로 입성합니다. 같이 들어온 동기로 최병서, 김보화, 박세민, 김정렬, 이상운, 이하원, 이재포, 엄용수 그리고 턱걸이로 들어온 이경규가 있었습니다. 제2기로는 황기순, 이원승이 합류했고, 1983년 제3기에 정재환, 배영만이 들어와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하며 호시탐탐 KBS를 압도할 준비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TBC 공채 개그맨까지 흡수한 KBS는 연기자 면에서 기선을 잡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최고의 예능 제작진이 있었습니다. TBC 시절부터 코미디 프로그램 제작의 내공을 쌓아온 김경태 피디가 있었고, 코미디를 꽃피워보겠다며 입사한 피디 김웅래가 있었습니다. 

 

개그맨과 프로듀서가 준비되면 남은 건 작가입니다. 개그맨으로 시작했으나 외모가 수사반장이라 작가로 전직을 한 임기홍과 김재화 작가,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로 직접 쓴 개그 대본으로 코미디 피디를 무작정 찾아가 감동시킨 후에 합류한 23세의 무서운 아이돌 작가 장덕균이 합류했습니다. 이렇게 구성된 피디, 작가, 개그맨이 각고의 노력으로 1983년 4월, 1980년대의 웃음을 책임지게 되는 프로그램 <유머 1번지>가 탄생합니다. 중심 장르는 콩트였습니다. KBS의 주말 저녁은 비공개 콩트인 <유머 1번지>와 청중 앞에서 콩트를 하는 공개 코미디 <쇼 비디오자키>라는 양대산맥으로 MBC를 압도했습니다.

 

80년대는 콩트였다

1970년대를 주름 잡았던 코미디 <웃으면 복이 와요>나 <고전유머극장>에서 단박에 떠올릴 수 있는 고정 코너와 고정 캐릭터가 있을까요. 특정 코너에서 반복적으로 했던 동작이나 생각나는 유행어가 있을까요. <웃으면 복이 와요>에 '양반인사법'이라는 명작 코너가 있습니다. 다만, 한 번 했습니다. 비실대던 비실이 배삼룡이 있지 않았냐고요? 물론 넘어지고 엎어지던 배삼룡은 불세출의 캐릭터였습니다. 다만, 비실대던 그의 연기는 이 코너에서도 했고 저 코너에서도 했으며 그 코너에서도 했습니다. 이에 비해 '반갑구만~ 반갑구만~'이라는 대사는 <유머 1번지>의 '북청물장수'라는 매주 하는 코너에서 반복적으로 조금산이라는 개그맨이 했습니다. '잘 될 턱이 있나'라는 김형곤 특유의 제스처와 대사는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라는 코너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음메 기죽어~ 음메 기 살어~ 등의 수많은 유행어와 그것을 연기했던 개그맨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캐릭터와 제스처나 유행어를 만든다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데 개그맨들의 비애가 있습니다. 물론 개그맨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라면 평생 가지고 갈 수밖에 없는 숙명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하루하루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웃기는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을지, 어떤 동작을 취하면 객석을 뒤집을 수 있을지, 어떤 대사를 하면 온 국민이 시도 때고 없이 따라하는 유행어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으로 채워집니다.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던 MBC 코미디

KBS의 위세가 워낙 컸기에, 한 개밖에 없는 경쟁 방송사 MBC도 KBS를 누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1984년 <청춘만만세>로 시작하여 88년 <청춘행진곡>으로 이름을 바꾸고 92년까지 방송을 합니다. 일요일 저녁에는 1981년부터 <일요일 밤의 대행진>이 고군분투했지만, 88년 겨울 <일요일 일요일 밤에>로 개편을 하면서 90년대의 비상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80년대를 호령했던 콩트 코미디 <유머 1번지>와 <쇼 비디오자키>도 서서히 내리막길을 가게 되었는데, 여러 요인 중 구조적인 이유 중 하나는 1991년 KBS와 MBC라는 양대산맥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바로, 민영방송 SBS의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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