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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송은 어떻게 흘러왔나

구봉서 배삼룡 시대, MBC <웃으면 복이 와요>

by 빵주작가 2023. 5. 9.

TV 방송이 생긴 후로, 이 프로그램이 방영이 되는 저녁이면 거리의 행인들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포복절도했습니다. 엄혹했던 시절, 국민들은 TV 속 코미디언들의 넘어지고 자빠지는 모습에 배를 잡았습니다. 지상파 3사 중 가장 늦게 출범한 MBC-TV는 더더욱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첫 번째 국민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제대로 된 방송 코미디를 만들기 위하여

1961년 KBS, 1964년 TBC-TV가 야심차게 출발하고 코미디 프로그램을 선보였지만, 두 달도 못 가고 문을 닫곤 했습니다. 저질스러워서 보기 힘들다는 비난이 줄을 이었습니다. 배삼룡도 당시 상황을 얘기한 적 있습니다. 코미디를 연구한 제대로 된 작가도 없었고 연출자도 보기 힘들었습니다. 코미디언들 또한 악극에서 해오던 대로, 변두리 극장 무대에서 웃기던 내용을 별다른 필터도 거르지 않고 방송했던 겁니다. 당시 주로 하던 코미디는 대부분 두 사람이 마이크 앞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만담 스타일이었습니다. 전국을 다니다 보니 코미디 작가가 있다 해도 적절한 대본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MBC가 개국을 준비하기 시작하고, 이제 시대는 제대로 된 방송 코미디를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TBC-TV는 신세계백화점 4층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공간에는 김경태 피디가 있었습니다. 그의 꿈은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코미디 연출자가 되는 것이었고, 일찌감치 웃음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했습니다. 충무로에 있는 외국 도서 전문 서점을 다녔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베르그송 같은 철학자들이 책으로 남겨놓은 웃음에 관한 이론을 파고 또 팝니다. 책상에 앉아 글만 읽은 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이건 웃음 유발하는 상황들을 미친 듯이 긁어모았습니다. 웃음을 주는 드라마의 장면들, 책의 한 토막, 신문을 보면서도 웃음을 주는 대목이 있으면 체크했습니다. 다방에 앉아 있을 때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귀를 쫑긋하면서 전개된 상황을 메모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년, 웃음을 주는 공식을 차곡차곡 늘려가게 되면서 아나운서 출신 아내와 함께 틈이 날 때마다 코미디 대본 작업을 합니다. 그렇게 그만의 코미디에 대한 이론과 철학이 갖춰져 가던 1969년 6월, 개국을 준비하던 MBC-TV에서 연락을 받게 됩니다. 그에 대한 소문은 이미 방송계에서는 꽤 퍼져 있었던 겁니다. 이른바 이적 제의였고, 제대로 된 코미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라는 제안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거부할 명분이 없었고, 그렇게 신생 방송사 MBC-TV로 갑니다. 

 

개국 준비에 한창인 MBC에서는 여러 장르의 프로그램들이 준비 중이었고, 김경태 피디에게는 당연히 코미디 프로그램이 할당되었습니다. 우선, 코미디 전담 작가진을 갖춰야 했습니다. 방송 코미디를 체득한 작가는 찾기 어려웠기에, 라디오에서 글을 쓰던 백승찬 작가를 모셨습니다. 거기에 자신과 함께 수 년간 코미디 공부를 함께 해온 아내 오신근을 작가로 데뷔시켰습니다. 연출진에서는 후배 유수열 피디, 배상석 피디와 진용을 짰습니다. 이제,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출연자입니다. 우선 악극에서 내공을 다져온 코미디언들인 구봉서와 송해, 박시명을 섭외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다른 미팅 차 들른 다방에서 배삼룡을 만나 섭외합니다. 또 세종문화회관 공연장에서 봤던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을 콤비 가수로 묶었습니다. 서수남 하청일입니다. 오프닝을 장식할 탭 댄서들도 합류를 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코미디 작가, 피디, 코미디언이라는 3박자를 갖춘, 명실상부한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가 1969년 8월 15일 밤 9시 25분에서 10시 45분까지 첫 방송을 했습니다.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의 트로이카

<웃으면 복이 와요>는 그동안 봐오던 코미디와는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6~7분짜리 콩트들을 여러 개 엮었고, 마지막 부분에는 '구첨지 상경기'라는 이른바 시추에이션 코미디를 배치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했던 코너들은 대박을 냈고, 연기를 한 코미디언들도 대부분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이기동, 송해, 박시명, 백남봉, 한무, 남철과 남성남 등입니다. 양반인사법이라는 명작 코너가 있었고, 어린이들까지 따라 했던 '배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동방삭 굴렁굴렁 굴렁쇠 치치카포 시리시리 센타 알리쏠리 모하메르 쏠리 차피리 차피리 난다이 난다이 쿵타쿵타 꼳떼 말리삐'로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으로 대표되는 코미디 트로이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슬랩스틱의 대가들이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비실거리고 뒤뚱거리며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몸짓이었습니다. 특히 서영춘은 녹화 전에 가장 먼저 나와 무대와 세트를 점검했습니다. 관객의 시선에서 자신이 어떻게 넘어지면 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지 연구했습니다. 희대의 납치사건의 주인공 배삼룡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비실비실이었고, 구봉서 또한 한국의 채플린이라는 수식어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코미디를 폐지하라?

하지만 1970년대라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는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려 하던 코미디를 어렵게 했습니다. 풍자의 대상은 극도로 제한되었습니다.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인, 재벌, 기업인, 각종 종교인, 교육자, 경찰, 군인 등이 풍자와 조롱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코미디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풍자의 대상이 사라졌으니,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넘어지고 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결국 '억지웃음을 강요하는 유치한 언동', '아동교육상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작희적 언행'이라는 경고가 쏟아지고 급기야는 1977년 모든 코미디 프로그램을 폐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때 실제로 방송 코미디 프로그램이 제작 중단되었는지에 대해선 기억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웃으면 복이 와요>의 김일태 작가는 2주간 제작 중단이 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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